<공연리뷰> 연극 '싸움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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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꾼들'의 한 장면. 퀵27호 역의 남수현-최교수의 딸 역 문하나 배우. (사진=강일중) |
벼랑 끝에서 삶을 버티는 사람들 얘기
논리적 이해 어려운 대신 이미지 뚜렷
(서울=연합뉴스) 강일중 객원기자 = 실상과 허상이 마구 뒤섞인다. 무대는 전혀 변하지 않은 채 등장인물의 현실과 환영(幻影)의 장면이 빠른 속도로 뒤바뀌며 펼쳐진다. 어느 것이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이고, 어느 것이 등장인물의 과거사 또는 악몽의 내용인지 그 경계조차 불투명하다.
대학로의 설치극장 정미소 무대 위에 올려진 연극 '싸움꾼들'은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작품이다. 개연성을 따진다면 1시간이 채 안 되는 공연시간이 힘들게 느껴질 수 있다. 대신 개별 장면이 주는 이미지는 뚜렷하고 투명하다.
등장인물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저마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산다. 그 상처는 시도 때로 없이 도진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좌절하고 분노할 때는 어김없다. 각자는 내면의 절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출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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퀵27호 역의 남수현(왼쪽) 배우와 최 교수 역의 유성주 배우. (사진=강일중) |
주인공은 '퀵 27호'라고 불리는 청년. 퀵 서비스 기사다. 오토바이를 타고 호출 목적지로 빨리 달리는 것만이 그에게 생존의 의미를 준다. 거의 중독 단계라고 할 수 있는 달림이 멈춰진다는 것은 그에게는 죽음이나 다름없다. 그에게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홀연히 그 앞에 환영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의 엄마. 엄마에게 의지하고 싶어도 그는 엄마를 잡을 수 없다. 손을 뻗치면 엄마는 뒷걸음쳐 사라지고 만다.
엄마는 청년에게 최 교수를 만나보라고 한다. 남의 아픔을 상담하는 역할을 하는 최 교수는 퀵 27호를 이종격투기의 세계로 안내한다. 이종격투기 링 안에서 퀵 27호는 상대인 마스크를 대상으로 싸우나 번번이 맞고 쓰러진다. 그는 퀵 서비스 기사로서의 현실의 삶과 이종격투기 선수로서의 허상의 삶을 구분하지 못한 채, 매일 살기 위해 달리고 죽을 정도로 싸운다. 그는 늘 패배자다. 최 교수는 그런 결과에 아랑곳하지 않고 퀵 27호를 링으로 내몬다.
이런 장면들을 통해 이 작품은 "산다는 것은 견디는 것"을 얘기하면서 벼랑 끝에서 삶을 버티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실은 만년 강사인 최 교수 자신이 이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패배자다. 딸은 그의 위선을 끝없이 조롱하고, 아내는 분홍 빛깔의 수면제 없이는 잘 수가 없다. 딸 역시 최 교수의 상담 대상인 퀵 27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또 여기에 매일 밤 자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꿈꾸듯 울고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퀵 27호를 연민하는 이웃 여자가 끼어든다. 각 등장인물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깊은 상처의 편린들을 드러낸다.
퀵 27호는 엄마를 괴롭힌 아버지를 죽인 뒤 집에 불을 지른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 작품의 무대는 불에 타 폐허가 된 집의 이미지로 디자인됐으며 무대 가운데에 이종격투기 시합이 벌어지는 사각링이 있다. 퀵 27호가 마스크와 죽도록 싸우는 사각링에서는 죽음 또는 묘지의 느낌이 풍긴다.
바이올린과 첼로 등 현악기를 중심으로 한 느린 속도의 현악이 음산함의 깊이를 더하는 역할을 한다. 퀵 27호가 주로 무대 중앙에서 연기를 하는 가운데 다른 등장인물들은 무대 좌우측의 의자에 1열로 앉아 자신의 역할이 돌아올 때 사각링의 중심으로 들어오는 연출이 독특했다. 또 퀵 27호와 마스크와의 이종격투기 경기 장면이 박진감있게 전개되면서 극을 보는 재미를 보탰다. 움직임지도와 무술지도 전문가가 제작과정에 투입돼 장면의 시각적 완성도를 높인 점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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퀵27호 역의 남수현 배우와 엄마 역의 문경희 배우. (사진=강일중) |
지난 7일의 첫날 공연 때는 퀵 27호 역의 남수현 배우가 좋은 연기를 펼쳤다. 다만, 발성 부분이 내면의 절규를 청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다소 미흡했다는 느낌이 있었다. 또 이미지가 강한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불타는 집의 시청각적 이미지가 그리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나는 달린다/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사자에게 쫓기는 사슴처럼/토끼를 쫓는 멧돼지처럼 달린다. 빙판을 가르는 썰매견처럼/시야를 가린 경주마처럼…"
퀵 27호의 달리는 이미지를 나타내는 이런 대사가 극 속에서 몇 번 반복된다.
◇ 연극 '싸움꾼들' = 극단 청우(대표 김광보) 제작. 2012 창작팩토리 연극 우수작품 제작지원 선정작.
만든 사람들은 ▲작 김민정 ▲연출 김광보 ▲무대디자인 김은진 ▲조명디자인 박상현 ▲음악감독 전현미 ▲의상디자인 이명아 ▲분장디자인 길자연 ▲움직임디자인 금배섭 ▲무술감독 김요한 ▲음향효과 안익수 ▲조연출 이보미.
출연진은 유성주·남수현·문경희·천정하·강승민·선승일·최승미·문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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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여자 역 최승미-퀵27호 역 남수현-최 교수 딸 역 문하나 배우. (사진=강일중) |
공연은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오는 17일까지. 공연문의는 코르코르디움 ☎02-889-3561,3562.
ringcycl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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