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실험극이 주는 '힐링'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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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양정웅 (서울=연합뉴스) 유용석 기자 = 극작가 사라 케인(1971-1999, 영국)의 작품 '크레이브(Crave)'를 처음으로 국내 무대에 올리는 연출가 양정웅. 이번 작품은 12월 17일부터 28일까지 서강대에서 메리홀에서 공연된다. 2012.12.16 yalbr@yna.co.kr . |
사라 케인의 '크레이브' 국내 초연..양정웅 연출 인터뷰
(서울=연합뉴스) 서혜림 기자 = "C 내 마음은 텅 비었어/ M 왜 웃고 있어요? /C 누군가 죽었어 /B 내가 웃고 있다고 생각해? /M 왜 엉엉 울지요?/C 당신은 내게 죽은 사람이야."
영국 극작가 사라 케인(1971-1999)의 희곡 '크레이브(Crave)'의 일부다.
A, B, C, M이라 불리는 4명의 화자는 저마다 말을 풀어놓지만 행간에서 논리적인 흐름은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의 언어는 일정한 의미나 메시지는 관객에게 친절하게 배달되지 않고, 발화(發話)되는 순간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스물여덟 살에 요절한 그가 남긴 희곡 다섯 편 가운데 네 번째 작품인 크레이브가 국내 초연된다.
양정웅(44) 연출이 이끄는 극단 여행자는 17일 서강대 메리홀 무대에 이 작품을 올린다.
공연 개막에 앞둔 14일 양 연출을 서강대에서 만났다.
연습으로 분주해 보였지만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작품인 만큼 기대가 커보였다.
"크레이브 공연은 2009년 독일 베를린에서 처음 봤습니다. 2005년에는 희곡 텍스트로만 접했었고요. 언어가 참으로 아름답고 시적이라는 생각했는데 이번에 직접 공연해 볼 기회가 왔습니다."
크레이브는 갈망한다는 뜻이다. 단지 '원한다(want)'의 차원을 넘어 강렬한 갈증을 내포한다.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케인은 이 작품으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절망을 이기려 했던 몸부림이 아니었을까요. 세상과 소통하고자 한 갈망과 열정을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또 극 중 '자유낙하'를 통한 자유를 말하는 대목이 있어요. 20세기 마지막 천재 작가라고 불리는 케인에게서 1930년대의 요절한 작가인 이상의 '날개'를 떠올려 볼 수도 있겠죠."
그는 이 난해한 실험극에서 '힐링'이라는 열쇳말을 찾았다.
겉으로는 지극히 정상적으로 살지만 내면은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이 이번 연극의 몫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통 '힐링'은 편안함, 고요함, 평화로움과 같은 정서를 일으키는 말인데 일정한 서사도 없이 거친 말들을 툭툭 내뱉는 이 실험극에서 관객은 어떤 방식으로 치유된다는 것인가.
양 연출은 상처를 위로하고 보듬는 전형적인 '힐링'이 아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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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양정웅 (서울=연합뉴스) 유용석 기자 = 극작가 사라 케인(1971-1999, 영국)의 작품 '크레이브(Crave)'를 처음으로 국내 무대에 올리는 연출가 양정웅. 이번 작품은 12월 17일부터 28일까지 서강대에서 메리홀에서 공연된다. 2012.12.16 yalbr@yna.co.kr . |
"인정하든 부정하든 세상엔 왜곡된 사랑, 절름발이 사랑은 존재합니다. 사람 내면엔 외로움과 상처, 어두운 본성도 있습니다. 부정하고 있던 이러한 내면의 모순을 인정하는 일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자기 인식의 순간은 상당히 처절하죠. 관객이 감추고픈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응시하도록 하는 것이 이 연극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불편한' 치유 방식을 택했을까.
"내면의 아픔을 끄집어내 이를 언어화할 때 그 자체로 치유일 수 있습니다. 파편적인 인물의 이야기 속에서 관객은 자신의 일그러짐을 직시하고 현재를 인식하고 성찰하는 거죠."
실제 등장인물이 토로하는 말은 일그러진 기억과 상처에 관한 것이다.
"그래 난 떨고 있어요. 그 여자에 대한 기억에 흐느끼면서, 그 여자가 나를 사랑했을 때, 내가 그 여자를 고문하는 사람이 되기 전, 그 여자가 내게 끼어들기 전, 우리가 오해하기 전, 말 그대로 내가 그 여자를 본 바로 그 첫 순간, 미소를 짓고 햇빛 가득 담은 그 여자의 눈, 그때 이후 내내 맹렬히 벗어나는 그 순간에 대한 슬픔으로 몸서리쳤지." (크레이브, A의 말 중)
"그러나 아버지는 그랬지. 열여덟 살에 자동차 사고로 코가 부서졌어. 난 이걸 얻었지. 유전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이걸 얻었어요." (크레이브, B의 말 중)
양 연출은 관객 각자에게 이미지로 파고드는 말이 극 중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콜라주처럼 흩어진 독백입니다. 등장인물 사이에도 정해진 인터렉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관객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대 위 배우의 말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자신의 마음을 파고드는 이미지를 인식하고 그대로 느끼면 되는 겁니다."
이번 공연은 '사랑의 역설 그리고 힐링'이라는 주제로 조최효정 연출의 신작 '나의 검은 날개'와 함께 선보인다.
양 연출은 두 작품 간에도 논리적인 연관성을 찾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다만 관객이 각자의 답을 찾아가면 된다고 했다.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죠. 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고, 영감을 받는 만남이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드문 만남 말입니다."
hrse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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